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징 조약 (문단 편집) == 의의와 이후의 동향 == 청은 이 조약으로 [[한일중]](韓日中) 중 최초로 외세에 굴복하여 무력 개항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1854년 일본은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으며, 조선은 1876년에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 [[청나라]]의 [[양무운동]] 추진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일본(에도 막부)가 미국에 굴복하여 두 번째로, 한국(조선)이 일본 제국에 굴복하여 세 번째로 쇄국정책을 폐지하고 개항을 한다.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여 식민 지배의 여지를 남긴 채 나라의 문을 열었다는 점도 난징 조약과 동일하다.[* 중국과 한국은 각각 [[난징 조약]]과 [[강화도 조약]]으로 강제 개항을 하여 점차 영국과 일본에게 예속되며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했다. 일본도 [[미일화친조약]]으로 개항한 이후 미국에게 잠식당하며 식민통치될 위기가 있었지만 미국이 곧 [[남북전쟁]]에 돌입하여 일본을 관리할 여력이 없어지자 그러한 정세를 십분 활용하여 미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을 나아갈 수가 있었다. 근대화 성공의 이유를 오로지 여기서만 찾을 수는 없지만 국내 정세가 안정적이고 당대 초강대국이던 대영제국에게 간섭당한 중국, 바로 이웃나라인 일본에게 간섭당한 한국과 비교하자면 일본은 비교적 시대적인 운도 따라주었던 측면이 있는 셈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이 1842년 난징 조약은 중국사에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 아니다. 청나라 [[강희제]] 때 [[루스 차르국]](러시아)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과 이후 [[옹정제]] 때 [[러시아 제국]]과 맺은 '''[[캬흐타 조약]]'''이 있기 때문이다. 난징 조약을 비롯하여 이후에 맺어지는 여러 [[열강]]들과의 조약은 청이 열강과 맺는 불평등조약의 시초가 되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 경제·정치·문화·영토면에서 청 침략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또한 난징 조약의 체결은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하는 데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1843년에 난징 조약의 후속 조약인 후먼 조약(虎門條約, 호문조약)[* 후먼(호문)은 지금의 광둥성 있는 소도시]을 영국과 맺었으며, 1844년 7월에는 [[미국]](당시 [[존 타일러]] 대통령 집권기)과 왕샤조약(望厦條約, 망하조약)[* 왕샤(망하)는 지금의 마카오 왕샤촌(망하촌)을 말한다.]을, 1844년 10월에는 [[프랑스]](당시 [[7월 왕정]] 프랑스)와도 황푸조약(黄埔条约, 황포조약)[* 황푸는 지금의 광둥성 광저우시 황푸구으로 후일에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진다.]을 각각 체결하게 된다. 그러고도 성이 안찬 유럽 열강은 [[애로호 사건]]과 [[선교사]] 문제 등을 이유로 또다시 청나라와의 전쟁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제2차 아편전쟁]]이다. 난징 조약 체결 이후, 청나라의 [[한족]](漢族)들은 [[태평천국 운동]]에서 드러나듯 [[만주족]]의 지배에 대한 불만을 더더욱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약 체결 당시 [[조선]]은 [[헌종(조선)|헌종]]의 치세로, [[세도정치]]기였다. 조선은 연행사[* 2019년 6월 현재 나무위키에 해당 별도 문서가 없다. '연행사(燕行使)'는 조선 후기에 조선에서 청나라로 파견한 사신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燕京, 현 [[베이징]])으로 간 사신(使臣)들을 의미한다. 조선 인조 15년(1637년)부터 고종 30년(1893년)까지 파견되었다.]를 통해 아편 전쟁과 난징 조약의 체결을 알았지만, --쪽팔렸던-- 청나라 측의 설명대로 1차 아편전쟁과 난징 조약의 체결을 그저 "오랑캐의 난동" 정도로 받아들였다.[* 참고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실권기 이전 세도정치기때도 통상수교거부정책(쇄국정책)을 고수했다.] 당시 조선이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서양 오랑캐"(영국)보다는 [[아편]]의 위험성이었다. 일본(당시 [[에도 막부]])은 청나라와 공식적인 국교는 없었지만, 당시 교역하던 화란(和蘭: [[네덜란드]])을 통해 전쟁의 결과와 난징 조약의 성격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는 이후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치다 방향을 바꿔 [[미일화친조약]]을 맺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다.[* 여러 중대한 요인들이 있으나, 이 짧지만 짧지 않은 차이는 19세기-20세기 초 한국과 일본의 운명을 크게 가른다. [[메이지 유신]] 문서로.] 훗날 청나라가 서양 세력에게 줄줄이 압도되고 난징 조약 체결 후 약 반세기(약 53년)만에 [[청일전쟁|만만히 보던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하자]], [[한족]](漢族)들조차 그동안 믿었던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중화사상]][* 자국 중심적인 세계관은 여러 북방민족국가와 [[한국]], [[일본]]뿐만이 아닌 세계 어디에나 있으나, 중화사상과 [[화이관]]은 한족에게서 시작된 특징이므로 한족을 적어놓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변법자강운동]]에서 드러나듯이 중국내에서도 급진적인 개혁(소위 '근대화', '개화')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다. 고로 난징 조약은 동아시아 근대의 첫 신호탄이 되는 조약이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